전통과 현대문화의 맥잇기 -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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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민일보 작성일2007.12.25 조회5,992회 댓글0건본문
전통과 현대문화의 맥잇기 -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죠”
사람..사람들 ... 큰들문화예술센터 전 민규 대표
‘쿵~ 덕쿵~덕, 얼쑤 ~ 좋다.’ 쇠, 북, 장구, 징, 소고가 하나가 움직이듯 제 차례에 맞춰 울려댄다. 빨랐다, 느렸다 상모꾼의 몸놀림이 변화무쌍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객석에서는 이내 박수가 쏟아진다. 무대가 따로 없고 객석이 따로 없는 모두가 하나된 자리가 공연 내내 연출된다.
올해로 창립 16년째인 큰들문화예술센터에서 펼치는 공연은 소박하다. 보는 사람도 소박하고 무대에 선 이들도 소박하다. 진주시 봉곡동 444-1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는 큰들문화예술센터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큰들은 시장통 입구에 위치해 있다. 산나물에서 작은 고기 몇 마리, 과일 몇 개를 두고 흥정을 벌이는 소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단순히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시민과 함께 하지 않는 자신들의 모습은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나름의 철학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꿈은 결코 소박하지 않다.
“전통문화예술의 맥을 계승하되 현대적인 감각과 정서에 맞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지역문화를 연구해 우리 문화의 전형을 창조하고 보급하는 것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언젠가는 우리가 하는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날이 올겁니다.”
88년 대학졸업과 함께 입단해 12년째 한 우물을 파고 있는 큰들문화예술센터 전민규(35) 대표. 96년에 2년 임기의 대표에 취임해 올해로 4년째 큰들을 이끌고 있다. 그가 취임한 이후로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지역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 큰들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크고 작은 공연의뢰가 줄을 잇는다. 불러주는 곳이면 아무데나 가야하지만 밀리는 스케줄로 그러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울 때가 최근에 부쩍 늘었다.
그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동물을 사랑했고 꽃이나 나무가꾸기를 즐겼다. 생물학과를 진학하면서 한국조류연구실에서 일했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동․식물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새를 연구하고 꽃이나 나무를 가꾸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 탈춤으로 시작해서 마당극을 공연하고 북과 꽹과리․장구를 치는 일에 더 익숙한 사람이 됐다.
“자연과 조경, 인간과 예술은 모든 면에서 닮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조금씩 지역에서도 큰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제 반은 달려온 셈이지요.”
그가 꽹과리 치고 장구치는 일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86년.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과 학예제에서 선배 권유로<송파 산대놀이> ‘취발이’역을 맡으면서 민속놀이와 전통문화에 심취했다. 평소 탈춤과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던 터라 곧바로 고아원 봉사활동과 함께 민속연구동아리 ‘민속극 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동아리에 들자마자 손에 피가 나도록 장구를 두들겼다. ‘민속극 연구회’에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돼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와 큰들에서 북과 장구, 징, 꽹과리 등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고성오광대, 밀양송파3대놀이, 전라도 필봉농악을 찾아다니며 전수했다. 고향에서 자신이 배운 것을 전수하겠다는 그럴싸한 꿈도 꿨었다. 졸업과 동시에 서울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에 자리를 잡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편견이 그를 힘들게 했다. 특히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무작정 고향에서 장구 두들기고 북치는 일을 하겠다던 자식에게 부모님은 멀쩡한 대학 나와서 무슨 짓이냐고 반대했지만 대학동안 꿈꿔왔던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당시 진주에는 문갑현(들소리), 강동옥․김완섭(이상 진주오광대)등 고향선배들이 ‘놀이판 큰들’을 창단해 마당극을 중심으로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징과 꽹과리․북․장구를 두들겨 대면 주위에서 이상한 눈으로 보던 시절, 그들의 활동은 사람들의 편견속에 휩싸여 있었다. 마땅한 연습장소가 없어 야외에서 사물놀이나 마당극을 연습할 양이면 이내 주민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봤다. 연습도중에 경찰서에서 발급하는 경고장을 받고 연습을 중단한 것이 여러번이다.
97년 지금의 사무실에 보금자리를 꾸미기 전 장마비에 중앙시장 지하공간이 물에 잠겨 7개월여 동안 사무실과 연습장도 없이 어려운 생활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사무실로 옮긴 뒤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방음처리된 연습실까지 갖추고 있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큰들은 지금 지역적인 한계를 넘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기도 하고, 지역축제와 예술제 등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올해로 3번째 열리고 있는 진주 탈춤한마당은 건전한 지역문화를 정착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매년 시민을 대상으로 한 풍물강습, 워크숍, 사물놀이 강습, 사물놀이 악기 무상수리 등 지역밀착형 프로그램들은 이미 수준급이다.
“지역축제나 예술제가 열악하고 일회성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는 있습니다. 지역민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참신한 기획으로 행사를 정례화하는 게 지금으로선 중요한 일이죠.”
그는 스스로 수준이 낮다고 말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연하면서 하나씩 극복해 나가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큰들이 하고 있는 일에 “너희들 수준 낮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 ‘큰들’이 걸어온 길
큰들은 83년 8월 ‘물놀이패’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84년 마당극<진양살풀이>를 창단 작품으로 첫 공연하고 마당극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1년 뒤 ‘놀이판 큰들’로 개명하면서 <한솥밥 먹기> <잿밥타령>등 마당극과 우리놀이 큰 배움터, 민속놀이 한마당을 개최하는 등 매년 새로운 프로젝트로 지역밀착을 시도한다.
마당극을 중심으로 공연기획 및 연출의 경험을 살려 청소년문화캠프, 서부경남 청소년 문화배움터 개최, 청소년반 ‘한누리’ 소년소녀가장돕기 공연, 어머니풍물패 국악발표회, 진주탈춤한마당 주관, 진주어린이 풍물예술단 창단공연, 청소년어울마당 주관 등 해마다 많은 일을 치러냈다.
특히 98년 창작마당극<논개>와 99년 노숙자와 부랑자들의 삶과 애환을 그려낸 <난장>, 그리고 국제탈춤페스티벌에 초청된<신토비리>는 큰들에서 만들어낸 큰 성과로 꼽힌다. 이중에도 농촌과 농민의 아픔을 담아낸 <신토비리>는 불과 1년도 안돼 전국적으로 50회가 넘는 공연기록을 세웠다.
올해 큰들은 <신토비리>공연을 중심으로 흥부전․논개2․통일단막극 등 창작마당극을 준비 중이다.
■ ‘큰들’이 하는 일
△마당극, 풍물판굿, 사물놀이, 무굿 (위령굿) 등의 공연활동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각종문화행사, 지역축제, 시민대동놀이 등의 행사기획
△마당극 극작, 장구병창, 연기, 영남사물놀이, 설장구, 탈춤, 민요배우기 등의 교육강습활동
△큰들어린이풍물단, 어머니반, 청소년 영상동아리 활동등의 교육활동
△마당극, 지역설화 및 전설극화, 공동체놀이, 대동놀이 등을 창작하는 창작활동
△각종 행사 촬영,편집, 상영, 영상교육 등의 영상활동
△전통악기, 소품 보급 및 악기무상수리 등의 악기보급
△전통의 분위기와 멋, 현대적 내용이 결합된 혼례식 진행등의 전통혼례사업
△시민단체․시청등 기타 단체와 문화연대활동과 지원사업
<경남도민일보 2000..10. 06 임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