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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웃음의 의미 (민족예술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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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예술 작성일2007.12.25 조회4,9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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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진주큰들문화예술센터 <흥부네 박터졌네>/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웃음의 의미 - 김소연 - 연극 _ 진주 큰들문화예술센터 <흥부네 박터졌네> 제6회 과천마당극제 개막일. 과천이 처음이라는 한 대학생과 우연히 공연을 함께 보게 되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 엄마 아빠와 함께 온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 젊은이들이 객석을 빽빽이 채우고 있다. 벌써 6년째 과천을 오가고 있는 나에게는 별로 눈길을 끌지 않았던 형형색색의 객석 풍경이 과천을 처음 찾은 이 친구의 눈에는 무척 흥미로웠나 보다. “와, 이 동네 사람들은 참 좋겠어요.” 물론 공연이 시작되자 이 매력적인 풍경은 곧 엄청난 훼방꾼이 되고 만다. 아이들은 떠들고 불쑥 판으로 뛰어드는가 하면 관객들은 끊임없이 들고 난다. 눈 앞의 공연이 조금이라도 쳐진다 싶으면 객석은 대책 없이 흐트러지고 공연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과천마당극제는 애호가들이 몰려들어 술렁이는 축제가 아니다. 객석에서나 거리에서 축제를 술렁이게 하는 이들은 과천에 살고 있는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이다. 애호가들은 아이들과 함께 혹은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가족들 틈에 끼어 공연을 본다. 때때로 훼방꾼으로 돌변하는 이들이 애호가들에게는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극과 생활의 이러한 긴장이야말로 과천마당극제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과천의 객석은 일상의 삶과 단절된 연극적 고민에 귀 기울이지도 않지만 또한 일상의 삶을 도발하지 못하는 연극 또한 외면한다. 과천마당극제의 활기는 일상의 공간에 열려있는 연극이라는 독특한 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해를 더해가면서 과천마당극제의 이러한 독특한 지점이 점차 명확해지고 또 안정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당극의 양식적 측면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하고 풍성한 공연물들이 제시되면서도 그것이 잡다한 백화점식 나열에 빠지지 않고 수렴의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민중연희에서 시작되어 12세기 궁중연희로 정착된 <베트남 물인형극>과 과장된 이미지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라틴아메리카의 거리극 <공연하지마>, 프랑스 중세 소극 <삐에르 빠뜨랑>과 한국 전쟁에서 죽은 원혼을 달래는 다시래기 굿판이 벌어지는 마당극 <꽃등들어 님오시면> 그리고 워크숍에서 시작하여 공연까지 일반인들과 함께 만들어낸 <바리공주와 생명수> 등 시대와 문화를 종횡하는 다양한 형식과 시도들은 전통과 현대, 야외와 실내극장, 위무로서의 연극과 현실 규명으로서의 연극 등 마당극의 열린 연극으로서의 다양한 가능성들이 펼쳐진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가능성의 중심에서 그것을 명확히 하고 심화시키는 중심에 있어야 할 국내 마당극 운동 집단들의 작품이 다양한 문제의식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소재, 전통연희에 바탕한 연극적 기호들, 그것이 만들어내는 질감 등 문제제기의 방식이나 그 해결에서 보이는 경향성은 현재진행형의 양식으로서 마당극의 생동성이 위축되어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이러한 경향성을 마당극 운동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의 문제만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 각 작품의 성취의 지점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형식에서나 작품의 발언에서나 시대와의 긴장이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작품을 선택하고 배치하는 기획의 문제이기도 하고 각 작품의 내적 문제이기도 하다. 진주 큰들문화예술센터의 <흥부네 박터졌네>(박세환 작연출)가 주목되는 것은 마당극의 개념과 가능성을 협소화시키는 경향성에서 비켜선, 문제제기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흥부와 놀부, 춘향과 몽룡에 심봉사와 뺑파 심청까지 익숙한 고전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일견 예의 경향성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전의 인물과 사건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발화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거기다가 서로 다른 고전의 인물들이 가족관계로 얽히면서 인물과 사건은 원작의 의미망을 떠나 극의 전개에 따라 자유롭게 떠돌아다니게 되고 충돌과 변형의 파격은 극대화되며 다양한 상황들이 압축적으로 전개된다. 박을 둘러싼 다툼으로 흥부와 놀부가 이별하는 데에서 시작된 연극은 어찌어찌 하여 거부가 된 흥부의 생일잔치로 옮겨간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면서도 꼼꼼히 부조금을 챙기는 흥부는 거지꼴로 나타나 북녘골을 도와달라는 놀부의 외아들 조카 몽룡을 매정하게 내쫓는다. 몽룡이 쫓겨나자 이번엔 변사또가 등장하고 흥부와 변사또는 정치자금을 주고 받는다. 이들의 수작은 흥부의 부인인 월매의 기생집 월매관으로 자리를 옮기며 이어진다. 월매관의 기생들을 점고하던 변사또는 어린 춘향을 발견하고 춘향을 취하려 하지만 흥부와 월매는 춘향은 탐관오리 낙선운동이나 뛰어 다니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라며 이를 모면하려 한다. 그러자 변사또는 탐관오리 낙선운동이라는 말에 북녘골과의 군사적 대치상황을 환기시킨다. 포졸들의 훈련장면이 우정의 무대로 이어지고 무대 뒤의 어머니는 키 179㎝에 몸무게 45kg의 아들을 찾는다. 사실 이 작품에서 사건 전개를 쫓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어지는 사건들은 인과적 맥락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식으로 연결되는 아이들의 말놀이처럼 사건은 아주 사소한 단서들로 연결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도대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 그러한 물음을 던질 겨를도 없다. 놀부 심보의 흥부 이야기가 변사또의 등장으로 부와 권력의 정치자금 거래로 이어지고 춘향에 대한 변사또의 탐욕에서 갑작스레 낙선운동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우정의 무대에서는 병역공방이 풍자된다. 선거를 앞둔 변사또는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위해 남남골의 사람들을 이편 저편으로 나누어 싸움을 붙이는데, 한판 붙기 위해 옷을 벗는 순간 모두 ‘Be The Reds’ 붉은 티를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싸움의 긴장은 축구공을 둘러싼 축제로 변해버린다. 사면초가에 몰린 흥부가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고 되감기 화면처럼 장면들은 빠르게 거슬러 올라가면서 상황을 다시 되돌리고 흥부와 놀부는 다시 만나 함께 박을 타게 된다. 익히 알고 있는 고전의 인물과 사건이 새로운 의미와 맥락에서 종횡하는 데에서 오는 웃음은 다시 민감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풍자로 이어지고 증폭된다. 두서없이 충돌하는 연극의 전개에서 현실은 단편 단편으로 쪼개져 있지만 그것이 현실의 파편화로 타락하지 않는 것은 함께 모여 앉아 풍자의 웃음을 날리고 있는 공연의 현장성 때문이다. 객석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은 연극이 그 단면에 주해를 덧붙이는 것보다 더 큰 힘으로 현실의 문제를 명확히 하고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때때로 풍자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웃음에 대한 집착은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경유하여 현실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근래 마당극들의 경향성에 비해 <흥부네 박터졌네>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 제시되는 현실은 조각나 있으며 문제의 해결 또한 연극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지만 바로 그러한 연극적 힘으로 현실을 마주서게 한다는 것이야 말로 이 작품의 중요한 성취이다. 또한 지난 80년대 현실의 단편들에 대한 풍자가 리얼리즘의 방법론으로 비판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의 웃음의 힘은 다시 90년대라는 변화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의 웃음 전략은 80년대의 그것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십 수 년 변화의 시간을 경과하면서 비판의 대상이었던 전략이 오늘 여기의 문제를 포착하는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흥부네 박터졌네>의 또 하나의 중요한 성취는 양식 그 자체가 가치와 이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양식과 이념의 문제를 다시 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 _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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