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면 거기 눈물로 지새운 어머니의 삶이 있었네(민족예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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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예술 작성일2007.12.25 조회4,724회 댓글0건본문
큰들문화센터 <여자, 죽자, 살자>- 뒤돌아보면 거기 눈물로 지새운 어머니의 삶이 있었네
▲ - 큰들문화센터 <여자, 살자, 죽자>
- 진은주 큰들문화예술센터 기획실장
정치가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내는 형식적 틀이라면, 문화예술은 그 틀을 채우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면서 삶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알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치는 딱딱하고 재미없고 머리 아프지만, 문화예술은 부드럽고 재미나고 신나는 놀이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정치적 문제나 풀기 어려운 사회현상이라도 그것이 문화예술의 형태로 사람들 앞에 선보이면 사람들은 선뜻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그런 연유이다. 사람들은 어지러운 논쟁에 익숙하기보다는 가슴을 적시는 감동에 목말라한다. 그래서 문화예술을 일컬어 사람의 내면을 움직이는 작업이라 하기도 하고, 예술가를 인류영혼의 엔지니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은 시대의 논란거리를 사람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사람의 내면을 흔들고 그 내면의 움직임을 통하여 결국은 세상을 움직이게 하기도 한다.
딱걸렸어, 호주제!
호주제가 사회적 문제로 전면에 등장하고 호주제 폐지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합의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큰들문화예술센터(이하 큰들)가 마당극 <여자, 죽자, 살자>을 내놓았다.
호주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계의 한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에 공감을 형성하고 여론화되어 곧 법개정의 도마에 오른다. 이러한 때에 불합리한 호주제에 대한 문화예술적 접근은 호주제의 실체를 알리고, 그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반가운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경남 진주에 사무실을 두고 전국을 무대로 공연을 다니고 있는 큰들은 본격적인 마당극 활동을 시작한 1997년 이후 줄곧 우리 사회의 논쟁에 중심으로 서 있는 문제를 마당극 소재로 다루어 왔다. 통일, 노동문제, 농가부채, 환경오염 등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들을 풍자와 해학의 민족극, 마당극의 그릇에 담아왔다. 배꼽 빠지게 웃다가도, 한순간 가슴 시큰해지는 눈물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마당극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시대문제를 고민하고 그 문제에 대한 대안과 희망을 제시함으로써 진정한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자기 사명을 수행해왔다. 큰들이 새롭게 선보이는 마당극 <여자, 죽자, 살자> 또한 그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찬성과 반대의 팽팽한 대결을 넘어, 왜 호주제가 폐지되어야 하는지를 군더더기없이 속시원히 보여준다.
다섯 명의 여자 배우들이 펼치는 모녀 3대의 이야기
요즘같이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지고 ‘그렇잖아도 여성들 세상’이라는 남자들의 원망섞인 푸념이 거세지는 이때, 아직도 여자들이 할 말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아들 낳기 위해 수 차례 낙태를 감수하는 사람, 아들 못 낳아 은연 중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 딸 둘 데리고 외출하면 자연스럽게 주위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 등등 말로만 여성상위시대, 아들 딸 차별 없는 세상일뿐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가 남아있고 그로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마당극 <여자, 죽자, 살자>는 여자로 태어난 죄(?)로 저마다 죽고 싶은 괴로운 사연 한 가지씩을 지닌 모녀 3대의 이야기이다. 아들을 못 낳아 평생 시어머니는 물론 남편의 구박까지 감수해야했던 어머니 한씨와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어린 딸 새봄이를 데리고 이혼한 한씨의 큰딸 재숙, 시어머니의 아들타령에 수 차례 낙태를 거듭하고 살아가는 한씨의 둘째딸 경숙, 새아버지와 성이 달라 새학기만 되면 죽고 싶은 맘이 들 정도로 괴로운 한씨의 외손녀 새봄이. 이들 모녀 3대의 이야기 속에 호주제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호주제가 부추기고 있는 남아선호사상, 여아낙태, 왜곡된 가부장적 권위가 불러오는 가정폭력의 현실을 함께 그려내고 있다.
시종일관 웃음이, 가슴이 싸해지는 감동이
마당극 <여자, 죽자, 살자>는 현실적으로 민감하고 자칫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호주제 폐지’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간 큰들의 작품이 그러했듯이 시종일관 코미디를 능가하는 웃음이 있다. 또한 웃음만 있다면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공백을 순간순간 가슴이 짠해지는 감동이 채워주고 있다.
다양한 볼거리와 친숙한 캐릭터가 조화롭고, 극의 전반에 흐르는 웃음과 감동, 그리고 깊이 있는 내용의 전달은 대중성과 예술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채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진가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칠십대 할머니에서 고등학생 손녀딸로 이어지는 삼대의 이야기인 만큼 세대별로 공감할 수 있는 폭도 넓다.
어머니, 이제 그 굴레를 우리 손으로 깨렵니다
모든 문화예술은 그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오죽하면 연극의 3대요소가 배우, 관객, 무대이겠는가. 이번 마당극 <여자, 죽자, 살자>를 보면 그 모든 것을 제치고 관객과의 의사소통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극이 진행될수록 우리 삶을 그대로 빼닮은 사실적인 묘사에 많은 여성들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남성들 또한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온 가부장적인 세계관에 대해 새롭게 눈뜨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슬며시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 곁에, 그 손을 꼭 잡아주며 잠시 허공을 바라보시는 아버지… 남성과 여성이라는 그 이분법적인 틀을 깨고, 어느 일방의 기득권을 거부하고, 모두가 인간으로 대접받고 인격적으로 존중받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야 할 시대다. 호주제라는 굴레를 깨뜨리는 일,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주인되는 자주시대의 첫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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