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카스트로를 사랑하는 이유 - 옮겨왔어요.. 걸판의 오세혁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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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민규 작성일2008.02.20 조회5,359회 댓글5건본문
내가 카스트로를 사랑하는 이유
[기고]이 시대 최고의 휴머니스트, 피델 카스트로
오세혁 (안산 통일마당 회원, 마당극단 걸판 단원)
피델 카스트로가 국가 평의회 의장을 사임했다. 나는 식당에서 저녁밥을 먹으면서 뉴스로 그 소식을 들었다. 내가 저녁밥을 먹으며 나의 하루를 완성해 가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는 한 인간의 역사가 완성이 되고 있었다. 피델이 독재자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혁명을 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사랑하는 조국 쿠바를 바꾸기 위해 그란마호를 타고 떠났던 서른 살의 청년은 여든이 넘은 노인이 되어 파란만장한 항해를 마쳤다. 이제 그는 잠시 그란마호에서 내리고 그가 헤쳐 왔던 혁명의 뱃길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원래 부유한 농장 지배인의 아들이었다. 혁명을 하지 않아도, 총을 들지 않아도 얼마든지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캐딜락을 타는 대신 그란마 호를 타고, 시가를 집는 대신 총을 들었다. 그는 대체 왜 편한 침대를 마다하고 정글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1. 맨발의 아이들
피델의 아버지는 부유한 농장 지배인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운동도 좋아하고 독서도 좋아했지만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친구들이었다. 늘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그를 제외하곤 모두가 가난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항상 자기 집에 데려가 식사를 대접했다. 자기 옷이든 장난감이든 아까워 않고 친구들이 원하면 그냥 주었다.
어린 피델은 친구들을 통해서 쿠바의 소름끼치는 가난에 눈을 뜨게 된 것 같다. 그 당시 쿠바 민중들의 3분의 2는 집도 아닌 움막에서 살았다. 하루 종일 허리 굽혀 사탕수수 농사를 해도 사탕수수 껍질조차 먹기 힘들었다. 하루 세끼를 다 먹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피델의 친구들은 항상 맨발로 다녔다. 그 맨발을 통해 기생충이 감염되어 목숨을 잃는 아이들도 있었다. 피델은 이런 사실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왜 세상에는 잘사는 사람이 있고 못사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아주 원초적인 고민에 잠겼다. 어릴 때는 이런 고민을 많이 하다가도 나이를 먹다보면 세상에 순응하고 적당히 사는 것이 정상이다. 특히 피델처럼 부유한 집 도련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피델은 계속해서 고민을 했다. 사람들이 모두 안락한 집에서 따뜻한 식사를 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수는 없을까. 라는 고민 말이다.
그의 항해의 계기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2. 맨발의 변호사
운동과 책보다 사람을 더 좋아했던 아이는 쿠바의 곳곳을 발로 뛰어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되었다. 젊은 변호사 피델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쿠바 사회의 비참한 현실에 더욱 더 눈을 뜨게 되면서 그 원인과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 했다.
먼저 피델은 원인을 찾았다. 쿠바의 민중들이 비참하게 사는 원인은 쿠바가 미국의 식민지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쿠바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한 이후 400년이 넘도록 스페인의 식민지로 살아왔었다. 쿠바 민중들의 용감한 투쟁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이 쿠바에 탐을 내면서 잽싸게 가로채갔다. 스페인 깃발이 내려가고 미국 성조기가 올라갔을 뿐 식민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젊은 피델의 눈에 보이는 쿠바는 미국 기업의 돈 주머니를 불려주는 쿠바, 미국이 원하는 땅은 어디든 내줘야 하는 쿠바, 미국 마피아들이 전 세계 암흑가 회의를 마음대로 여는 쿠바, 친미 매국노들이 고층 빌딩 옥상에서 수영을 즐기는 쿠바, 하루 종일 사탕수수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누더기 움막에서 웅크려 잠드는 쿠바, 가난한 아가씨들이 외국인들에게 몸을 팔 수 밖에 없는 쿠바였다. 쿠바의 대통령들 또한 미국이 조종하는 허수아비들 아니면 아예 미국사람이었다. 그러다가 풀헨시오 바티스타라는 군인 출신 독재자가 등장하면서 쿠바는 더 ‘친미적’이고 더 ‘부패적’이고 더 ‘공포적’인 쿠바가 되었다.
원인을 알아낸 피델은 해답을 찾았다. 원인이 간단한 만큼 해답도 간단했다. 쿠바에서 독재자를 몰아내고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비호 속에 총칼로 권좌에 오른 독재자를 대화로서 몰아내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피델은 책을 내리고 총을 들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독재자 바티스타와 미국에 대항하여 싸움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1953년 7월 26일, 청년 피델과 150여명의 동지들이 쿠바 산티아고에 위치한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다. 병영을 점령해 무기를 탈취하고 통신사를 점령하여 대규모의 무장 투쟁을 벌일 계획이었다. 작전상의 미숙과 실수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쿠바 전역에 피델 카스트로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피델과 동지들은 사로잡혀 15년 형을 선고받는다. 이 재판에서 피델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남긴다. 그 연설은 소책자로 제작되어 쿠바 민중들의 가슴속으로 퍼져나갔다.
“그 어떠한 판결도 진실을 잠재울 수는 없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최후의 심판은 역사가 내릴 것이다. 역사라는 법정에 서면 오늘의 재판관은 내일의 피고가 될 것이며, 오늘의 피고가 내일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피델카스트로,몬카다 병영 습격 이후 최후 진술-
비록 외딴섬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피델은 갇힌 속에서도 오히려 더 치열한 독서와 토론과 운동을 실천하면서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혁명에 대한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3. 맨발의 게릴라
1956년 어느 날, 그란마호라는 배가 멕시코 항구에서 쿠바를 향해 조용히 출항했다.
8인승인 그 배에는 80명이 넘는 건장한 전사들이 타고 있었다. (이중에는 아르헨티나의 젊은 의사 체게바라도 있었다.) 인원을 초과한 배는 우여곡절 끝에 쿠바에 상륙했다.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티스타의 군대와 전투기들이었다. 그들의 폭격 세례를 받고 80명의 인원은 12명으로 줄어든다. 그 12명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 속으로 숨어든다. 인원도 없고 무기도 없고 식량도 없었다. 벌거벗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산 속 여기저기를 떠돌며 고생에 고생을 거듭했다. 그런 그들을 구해준 것은 가난한 농부들이었다. 농부들은 그들이 입은 군복과 그들이 가진 총을 두려워했다. 처음에는 그들을 피하거나, 그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신고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농부들은 점점 그들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바티스타의 군대와는 달랐다. 총으로 위협하지도 않았고 아무 집이나 들어와 물건을 강탈해 가지도 않았다. 여자들을 겁탈하지도 않았으며 집을 불태우지도 않았다. 늘 예의를 갖추었고 필요한 물건은 꼭 돈을 주고 구입을 했다. 절대로 피해를 입히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부들에게 자신들이 바티스타와 맞서 싸우는 이유는 바티스타의 독재를 끝장내고 쿠바 민중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힘차게 얘기했다.
농부들이 그들을 돕기 시작했다.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해 주었고, 안전하게 주둔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산 밑의 동지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고 아예 혁명군에 입대하여 함께 싸우기를 결의하기도 했다. 혁명군도 그들을 도왔다. 글을 가르쳐주고, 일을 거들어주고,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었다.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대우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가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시에라 마에스트 산에 모여들었다. 한명이 두 명이 되고 두 명이 네 명이 되면서 ‘인간다운 세상’의 꿈은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넘어 쿠바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고 그것은 곧 쿠바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처음 쿠바에 상륙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알몸이었다. 혁명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던 맨발의 게릴라들이 3년도 채 못 되어 혁명을 완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쿠바 민중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4. 맨발의 의사들
그란마호가 쿠바에 상륙한지 50년이 지났다. 그동안 쿠바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들이 있었다.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아왔던 농부들이 자신의 땅을 갖게 되었고 집 없는 사람들이 집을 갖게 되었다. 70평생 까막눈이던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몸이 아파도 병원 한번 못 가던 사람들이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인종 차별은 자취를 감추었고 카지노와 매춘굴이 사라졌다. 쿠바의 민중들의 70%는 문맹이었기에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복잡한 개념들은 잘 몰랐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난생처음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 하나 만으로 쿠바의 민중들은 피델과 혁명군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물론 쿠바를 떠나는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바티스타의 편에서 호강을 누리던 이들이었고 나머지는 피델이 말하는 사회주의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데 왜냐면 그들은 교육을 그렇게 받아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었다. 쿠바가 미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쿠바의 토지, 산업, 자원, 금융의 70% 이상을 미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쿠바가 미국의 쿠바가 되기를 원했지 민중의 쿠바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엄청난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 압박을 취해오고 있다. 그리하여 쿠바는 전쟁 위협에 시달리기도 하고 무역 봉쇄로 인해 한 톨의 식량과 한 알의 의약품조차 수입하지 못하기도 했다. 특히 90년도 소련 붕괴 이후 사회주의 나라의 씨를 말려버리려는 미국의 가열찬 투쟁(?)으로 쿠바에는 먹지 못해서 실명을 하고 몸이 아파도 약이 없는 사태가 속출했었다. 석유가 없어서 차를 움직일 수도 없었고 전기도 끊겼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민중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기 마련이다. 쿠바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은 다시 한 번 피델에게 쿠바호의 선장 자리를 맡기는 선택을 했다. 그것은 피델이 이끄는 쿠바호가 나아가는 길이 바로 인간다운 세상을 향한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갖은 봉쇄 속에서도 피델과 쿠바의 민중들은 자신들의 혁명을 지켜나간다. 석유가 없는 대신 태양에너지를 발전시켜 전력의 60% 이상을 해결한다. 차 대신 대중교통과 자전거를 활용하니 환경이 놀랄 만큼 좋아졌다. 농약이 없는 대신 유기농 농법을 발전시켜 전 세계에서 제일가는 유기농 선진국이 되었다. 약품이 모자라니 허브 같은 대체 약초와 중국의 침술, 경락마사지, 기공들을 접합하여 새로운 대체 의학을 만들어가고 있다. 석유도 안쓰고 농약도 안쓰고 몸에 좋은 유기농 식품을 먹으니 쿠바인들의 건강은 자연스레 좋아질 수 밖에 없다. 평균 수명은 미국보다 훨씬 높고 영아 사망률은 미국보다 훨씬 낫다.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면서부터 쿠바인들의 삶의 질은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물론 쿠바는 아직도 가난하다. 생필품도 부족하고 민중들도 좀 더 풍족해지기를 원한다. 최근에는 미국 드라마와 나이키 신발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경제 봉쇄 속에서 말 그대로 좀 더 나은 생활을 원하는 것 뿐이지. 미국 같은 사회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피델의 그란마호는 쿠바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전 세계를 향해 출항을 시작했다. 전쟁이든 지진이든 가리지 않고 어디든 찾아가 환자를 치료해주는 ‘맨발의 의사들’이 쿠바에 있다.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전신마비 환자들과 백내장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기적’과도 같이 치료해주고 있는 나라가 쿠바다. 칠레의 아옌데가 대통령궁에서 맞서 싸우며 끝까지 들고 있었던 것은 바로 피델이 선물해준 총이었고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피델이다.
오늘날, 쿠바의 민중들, 아니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민중들은 피델 카스트로를 사랑한다. 심지어 동북아시아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본인 또한 피델 카스트로를 사랑한다. 내가 피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고 그가 연설을 잘해서도 아니다. 또 그가 잘생겨서도 아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살아오고 행동해온 인생 전체가, 바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휴머니즘으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피델이 물러나고 동생 라울이 차기 의장으로 유력하다고 한다. 비록 피델은 물러나지만 앞으로도 피델의 그란마호는 영원할 것이고 피델의 휴머니즘 또한 영원할 것이며 피델에 대한 민중의 사랑 또한 영원할 것이다.
댓글목록
김혜정님의 댓글
김혜정 작성일
피델 카스트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흠님의 댓글
흠 작성일
미국CIA가 300번넘게 암살을 시도해 실패했다던가?
카스트로....
내참님의 댓글
내참 작성일638번 암살 시도 실패...
세혁님의 댓글
세혁 작성일
헉! 잠시 들렸는데 약간 민망해지는군요 ㅎ
그래도...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임작가님의 '허준 공연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하하하
전이유님의 댓글
전이유 작성일
세혁아 부럽당
글을 너무 잘 쓴당
니글 읽고 공부가 많이 되었당
자주자주 이런글 쓰시게낭